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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진 NOW ]
  • 입력 2017.12.26 10:12

소비자의 마음을 진정으로 꿰뚫어본 휘슬러

독일기업의 철학에서 배우는 경영의 정도 #10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자동차를 몰고 2시간 가량 남서쪽으로 달리면 라인란트-팔츠(Rheinland-Pfalz)주가 나온다. 이 지역에는 이다어 오버슈타인(Idar-Oberstein)이란 소도시가 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웃음이 나는 일화가 하나 있다.

필자는 관광한답시고 밤 9시쯤 걸어서 이 동네를 돌아다녔다. 그런데 정말 길거리에 개미 새끼 한 마리 찾아보기가 힘든 게 아닌가.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다가 우연히 `나이트 클럽'이라고 쓰인 간판 하나를 발견했다. 순간 문화관광(?) 차원에서 용기를 내서 들어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동으로 옮겼다. 그런데 무엇인가 좀 느낌이 이상했다. 우선 들어가자마자 접해야 할 흥겨운 음악이 들리지 않는 게 아닌가. 귀를 의심했지만 정말 그랬다. 이번에는 눈을 의심했다. 나이트클럽의 주인공인 젊은이들이 없는 게 아닌가. 테이블도 여느 맥주집과 같은 모양이었다. 그저 수다 떨어가며 맥주 마시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눈에 띄었다. 황당했다. 그제서야 간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됐다. 밤에 맥주만 마시는 클럽도 엄연히 나이크클럽이란 사실을 말이다. 필자가 이다어 오버슈타인의 나이트클럽을 언급한 이유는 한국과의 인연이 남다른 세계적인 주방용품 전문업체 `휘슬러(Fissler)'가 그 곳에 있어서다.

 

▶ 휘슬러의 '품질 제일' 집념

휘슬러는 명성과는 다르게 공장건물이 전통 중소기업을 연상시킨다. 입구에 작은 간판과 직영 매장만 없으면 그냥 지나쳐버릴 정도로 평범했다. 20㎞ 거리의 농촌 마을인 노이브뤼케의 제2공장 역시 우리나라의 농공단지 같은 모습이었다. 휘슬러는 1845년 칼 필립 휘슬러가 창업해 170년 가까이 냄비, 프라이팬, 압력솥 등 오로지 주방기구만 생산해 온 독일의 장수기업이다. 4대째 오너 경영을 하고 있다. 제품 생산도 독일 내에서만 한다.

휘슬러는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품질개선과 첨단기술을 개발해 지구촌 주부들을 매료시키고 기술을 선도하고 있다. 평범한 냄비 같지만 휘슬러가 생산한 제품의 품질은 모두 다르다. 휘슬러만의 독창적 디자인과 첨단 특허 기술, 그리고 160년 남짓 축적된 장인의 손길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딸에게, 그 딸이 다시 며느리나 딸에게 대물림해 쓰고 권하는 주방기구란 별칭이 붙은 이유다. 휘슬러 직원들은 항상 "오래 쓰기 때문에 가격이 비싸다고 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신제품 개발을 위해 연간 매출의 6~8%를 연구개발(R&D)에 재투자하는 휘슬러는 제품과 생산공정분야 특허만 200여개를 보유하고 있다. 1855년 세계 최초로 제조공정에 증기엔진을 도입했고, 알루미늄 소재를 처음 주방기구 재료로 사용했으며 단열을 위해 손잡이에 플라스틱을 적용하는 등 휘슬러의 기술변천은 현대 주방기기의 역사 교과서다. 또 1890년 병 자동충전기를 개발해 맥주 자동생산의 길을 열었다. 1892년에는 야외 단체 취사용기, 1956년에는 늘어붙지 않는 코팅 팬, 1969년에는 압력솥을 잇따라 개발했다. 압력솥의 핵심 기술인 유로매틱 시스템은 내부 산소는 배출하고 외부 산소의 유입은 막아 진공을 유지시켜 주는 장치다.

1890년 물없이 음식을 조리할 수 있는 매직 시리즈를 비롯해 타이머를 부착한 압력솥, 냄비손잡이의 단열처리, 냄비 바닥에 균일한 열전달을 위한 알루미늄과 스테인리스 용접기술, 가스레인지를 대신할 신개념 미래 주방기구(Platin Star) 등 제품마다 특허가 아닌 것이 없다. 제품뿐만 아니라 냄비 바닥 용접, 프라이팬 등의 바닥을 찍어내는 프레스 공정 등 생산라인 대부분도 휘슬러만이 보유한 특허기술이다. 최고의 제조기법은 기술 유출이나 모방 등을 우려해 아예 특허신청도 하지 않는다.

품질을 위해 주문이 몰려도 OEM(주문자상표부착방식) 생산이나 현지법인을 만들지 않는다. 휘슬러의 기업경영 원칙이다. 현지 및 주문 생산을 할 경우 원가절감이나 물류비용은 줄일 수 있지만, 품질이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원천봉쇄하는 것이다. 휘슬러 제품은 1만5000번의 실험을 통과해야 하는 손잡이 중량 테스트(handle load alternation test), 3.6바(3.55기압)의 압력에서 5분 동안 견뎌야 하는 압력솥 변형 테스트(deformation test of pressure cookers), 폭발 압력 테스트(burst pressure test) 등 엄격한 각종 테스트를 통과하도록 돼 있다.

 

▶ '소비자 제일주의'가 이어준 한국과의 인연

휘슬러 경영의 기저에는 바로 `휘슬러는 소비자가 원하면 반드시 생산해 낸다'는 소비자 제일주의가 강하게 깔려 있다는 점이다. 공교롭게도 그 점이 한국과 뗄 수 없는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어 더욱 주목할 만하다. 휘슬러의 한국시장 매출액은 72개국 가운데 2위다. 독일 다음으로 많다. 한국은 머지 않아 독일까지 제치고 1위로 올라설 것으로 휘슬러 측은 전망한다.

휘슬러가 한국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것은 1999년. 이후 매년 성장세를 거듭하고 있다. 주력 상품은 압력솥이다. 원래 독일에서 돼지고기를 삶는 용도로 1953년 개발된 휘슬러의 압력솥이 한국에선 다른 용도로 잘 팔리게 된 이유는 한국과 독일의 역사적 인연에서 출발한다. 1960년대 후반부터 독일로 건너 간 한국의 광부와 간호사들이 밥을 지어 먹으려고 휘슬러 압력솥을 사용했고, 나중에는 부모 형제에게 "끝내준다"며 같은 압력솥을 선물로 보냈던 게 큰 계기가 됐다. 당시 한국 사람들은 독일에서 온 휘슬러 압력솥에 1년 묵은 정부미(政府米)를 넣고 지은 밥 맛이 햅쌀 맛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한국에서 휘슬러 압력솥의 인기는 이렇게 시작됐다. 이후 휘슬러 본사는 한국 소비자의 식생활을 집중 연구했다.

그 결과가 1972년 출시한 `솔라(Solar) 시리즈'다. 찜이나 전골 요리를 즐기고 가스레인지를 많이 사용하는 식문화를 반영했다. 냄비 뚜껑을 좀 더 높게 만들고, 손잡이도 불이 세도 직접 닿지 않도록 1㎝ 높였다. 압력솥의 4단계 조절 기능도 한국인들이 워낙 다양한 식재료를 쓰는 만큼 압력 세기를 세밀하게 조정하도록 고려한 것이다. 이 제품은 무려 40년 동안이나 한국에서 꾸준히 팔리는 `스테디 셀러'가 됐다. 만약 단종한다면 휘슬러는 부품 여유분을 20년치나 만들어둔다.

이처럼 휘슬러는 제품의 우수성을 바탕으로 소비자의 요구에 맞추고, 끝까지 배려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한다. 휘슬러의 연간 매출은 1억3000만 유로(약 2000억원) 안팎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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