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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진 NOW ]
  • 입력 2017.12.19 10:12

제품에 혼을 바치는 정열, 혼돈의 시대서도 빛난 몽블랑

독일기업의 철학에서 배우는 경영의 정도 #9

 

1919년 우리나라에서 3·1운동이 벌어졌던 그해에 독일은 제1차세계대전에서 패하여 독일제국이 사라지고 바이마르공화국이 출범했다. 바이마르공화국은 출범 이후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전시 인플레이션으로 마구 지폐를 발행한 탓에 1마르크 하던 감자 한 포대가 1,000억 마르크로 뛰어올랐고, 빵 한 조각은 800억 마르크, 맥주 한 잔은 2,000억 마르크였다.

마르크화 가치가 이렇다 보니 당시 노동자들은 하루치 임금을 손수레에 가득 싣고 다녔고, 주부들은 시장을 보기 위해 가방이나 바구니에 돈을 한가득 들고 다녔다고 한다. 급기야 1924년 독일은 100조 마르크짜리 지폐를 발행했는데, 이는 역사상 최고액의 화폐로 기록되고 있다. 당시 마르크와 달러의 교환 비율이 1조 마르크 대 1달러였으니까 100조 마르크권이라고 해봤자 100달러의 가치밖에 없었다.

혼란이 극에 달하던 1924년 그해, 독일 북부의 항구도시 함부르크 외곽의 헬그룬드베크 지역에 있는 몽블랑(Montblanc) 공장에선 ‘마이스터스튁(걸작)’이란 만년필이 첫선을 보였다. 두툼한 시거와 같이 큰 외양, 18K에 고풍스러운 장식이 새겨진 수공예품 금촉과 금 도금된 링(Ring) 장식, 천연 흑색수지에서 뿜어져 나오는 깊은 광택 등이 돋보이는 만년필이었다.
 

▶ 혼돈 속에서 태어난 걸작, '마이스터스튁(Meisterstuck)'

당시 극도의 혼란 속에서 파업과 혁명, 쿠데타 기도가 반복되고 패전으로 인한 좌절과 고통, 무정부 시대의 혼란 속에서 어떻게 몽블랑의 마이스터스튁이라는‘불후의 걸작’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마이스터스튁은 독일 기업인 몽블랑이 첫 출시한 지 9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당시의 디자인 그대로 생산돼 전세계 만년필 애호가들의 사랑을 꾸준히 받고 있다. 더군다나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 같은 수많은 디지털 기기가 쏟아져 나오고 있는 시대에서도 마이스터스튁은 연평균 10퍼센트 정도씩 성장하고 있다. 그 비결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고급화다. 디지털 시대에는 짧은 시간에 값싸게 대량생산하는 방식으로는 경쟁력을 갖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기능 위주의 저가제품 생산을 멈추고, 고가 프리미엄 만년필로 승부를 건 전략이 주효했다. 가령 두 나라 대통령이 오랜 전쟁을 끝내는 평화협정을 맺는다면, 요즘 유행하는 스마트폰으로 서명할 수 있을까? 또 아버지가 서른 살이 된 아들에게 “이 펜은 내가 너를 키운 30년 동안 쓴 것인데, 너에게 물려주겠다.”고 한다면, 그 아들은 어떤 느낌을 받을까? 바로‘디지털이 대체할 수 없는 게 있다’는 사실을 몽블랑은 간파한 것이다.

아날로그적 가치에 집중하는 몽블랑의 생존전략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있다. 몽블랑 공장의 생산 과정에서 ‘여성’과 ‘수작업’이 눈에 띈다는 점이다. 만년필은 100개가 넘는 공정을 거친다. 그만큼 제조 과정의 작업이 섬세하고 고도의 세공기술을 요구한다. 몽블랑의 작업 라인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이 대부분 여성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들의 만년필 제조 경력은 보통 20∼40년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대부분의 작업 과정이 자동화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작업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지고 작업 속도가 대단히 느리게 진행된다. 보통 만년필 한 자루를 만드는 데 6주 이상 기간이 소요된다. 보통 회사들은‘어떻게 하면 짧은 시간에 많은 제품을 만드는가’를 연구한다면, 몽블랑은‘시간이 걸리더라도 어떻게 하면 최고의 제품을 만드는가’를 고민한다.

몽블랑은 생산단가가 비싸게 먹히고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경험이 풍부한 마이스터들의 수작업으로 최고의 명품을 만드는 데 주력한다. 현대 산업사회의 철칙이나 다름없는 ‘대량생산’과 ‘스피드’ 를 피하고 최고의 품질을 위해 일부러 수작업에 의한 느린 생산공정을 100년 넘게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몽블랑 공장을 가보면, 언뜻 보기에 멀쩡한 제품이 파기되는 장면을 종종 볼 수 있다. 미세한 흠집이 있는 제품들인데, 대부분 돋보기로 자세히 들여다봐야만 알 수 있다. 아주 하찮은 하자라도 귀신처럼 찾아낸다. 그래서 몽블랑은 단순한 필기구란 개념을 뛰어넘어 ‘예술품’의 경지에 올랐다는 평가를 받는 것이다. 명품이란 대량생산 방식으로는 절대 오를 수 없는 경지가 있다는 사실을 몽블랑이 말해주고 있다.

둘째, 세계화다. 몽블랑은 1990년대 중국 시장에 처음 진출해 48개 도시에 100여 개의 매장을 두고 있다. 중국에서 벌어들이는 매출이 전체의 20퍼센트에 육박한다. 현재 세계 70여 개국에 약 300개의 매장이 있다.

셋째, 만년필 기술이 통할 수 있는 다른 제품의 발굴이다. 대표적인 것이 수제(手製) 시계시장이다. 기존 명품시계에 비해 품질이나 브랜드 면에서 밀려 초반에는 고전했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 2007년 150년 전통의 스위스 수제 시계회사인 ‘미네르바 인스티튜트’를 인수했을 정도다. 미네르바는 몽블랑의 고급 시계 컬렉션인 ‘빌르레(Villeret) 1858’을 만들어내고 있다.
 

▶ 만년필에서 시계까지, 고급화와 정열의 결정체

한편 세계적 명품인 몽블랑 만년필의 생산국이 독일인데도 소비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몽블랑을 프랑스산이나 스위스산 제품으로 생각하고 있다. 필자도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프랑스산으로 착각했다. 독일 제품 이름이 왜 독일스럽지 않은 몽블랑일까.

1906년 함부르크의 문구상과 은행가, 베를린의 엔지니어 세 사람이 모여 함부르크에 ‘심플로 필러 펜 컴퍼니(Simplo Filler Pen Company)’란 이름의 만년필 공장을 세웠다. 이 설립자들은 1909년 몽블랑을 상표 이름으로 등록하고 회사에서 생산되는 모든 필기구에 이 이름을 사용했다. 그리고 1913년에 육각형의 부드러운 모서리를 가진 하얀 별 ‘몽블랑 스타’를 브랜드 로고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세계적인 명품으로 대접받으려면 기계적인 독일 이미지보다는 패션왕국 프랑스 이미지를 차용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 전략에 따라 프랑스에 위치한 유럽 최고봉 몽블랑의 이미지를 빌려 몽블랑 정상의 만년설을 상징하는 흰색의 육각별을 만년필 머리에 얹어 회사와 제품의 심벌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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